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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 결정문의 진화 : 증거 거시(擧示)를 통한 사법 신뢰성 회복 방안

by 리걸 인사이터 2026. 2. 15.

재판의 결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가'를 설명하는 과정이다. 특히 국가 최고 규범인 헌법의 해석을 다루고, 때로는 대통령을 파면하거나 정당을 해산하는 등 거대한 파급력을 지닌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이라면 그 설득력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야 한다. 그러나 그동안 헌법재판 실무에서는 결정문에 구체적인 증거를 밝히는 이른바 '증거 거시(擧示)'가 다소 추상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이 글에서는 헌법재판 결정문이 가지는 서술적 한계를 짚어보고, 재판의 투명성과 객관성을 높이기 위한 실무적 대안을 모색한다.

1. "제반 사정을 종합하여"라는 마법의 주문이 낳은 불신

일반적인 민사소송이나 형사소송의 판결문을 보면, 판사가 어떤 증거(예: 갑 제1호증, 증인 A의 진술)를 채택하여 사실관계를 확정했는지 매우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헌법재판 결정문은 결이 조금 다르다.

 

헌법재판, 특히 탄핵심판이나 권한쟁의심판은 고도의 정치적·사회적 맥락(입법사실)과 구체적인 사건의 정황(재판관련사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러다 보니 재판부가 사실인정을 할 때 개별 증거를 하나하나 나열하기보다는, "기록에 나타난 제반 사정과 변론의 전 취지를 종합하면~"과 같은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문구를 사용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관행이 있어 왔다.

 

이러한 추상적 설시 방식은 재판관들의 합의를 도출하고 판결문을 매끄럽게 작성하는 데에는 유리할지 모른다. 그러나 패소한 당사자나 그 판결을 지켜보는 국민 입장에서는 "도대체 어떤 근거로 저런 사실관계가 인정된 것인가?"라는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이는 자칫 재판부가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증거를 끼워 맞춘다는 '자의적 사실인정'의 비판을 불러일으키며, 헌법재판소 전체의 사법적 신뢰도를 갉아먹는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2. 증거 거시(擧示)의 구체화: 객관성 확보를 위한 첫걸음

이러한 비판을 수용하여, 최근 학계와 실무계에서는 헌법재판 결정문 작성 시 '증거 거시의 구체화'가 강하게 요구되고 있다.

 

증거의 구체적 거시란, 재판부가 사실을 인정할 때 막연한 추론이나 정황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문서송부촉탁 결과에 따른 00부 내부 보고서(증거번호 제00호)의 기재 내용에 비추어 볼 때"와 같이 판단의 뿌리가 된 핵심 증거를 결정문 상에 명확히 밝혀 적는 것을 말한다.

 

결정문에 증거가 낱낱이 기록되면, 재판부는 증거 하나하나의 가치(증명력)를 더욱 엄격하고 신중하게 따져보게 된다. 당사자들 또한 자신들이 치열하게 다투었던 증거가 판결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투명하게 확인할 수 있어 재판 결과에 대한 승복률이 획기적으로 높아진다. 요컨대, 구체적인 증거의 설시는 판결의 논리적 비약을 막는 견제 장치이자, 재판의 객관성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보증수표인 셈이다.

3. 실무적 대응: 결정문을 주도하는 '증거 지도'의 설계

결정문의 작성 방식이 구체적 증거주의로 진화함에 따라, 헌법재판에 임하는 당사자와 대리인의 서면 작성 전략도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과거처럼 화려한 수사학이나 감정에 호소하는 추상적인 주장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변론 서면을 작성할 때는 재판부가 복사해서 결정문에 바로 가져다 쓸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한 '증거-주장 매칭(Matching)'이 필요하다. 단순히 수천 페이지의 자료를 뭉텅이로 제출하는 것을 넘어, 핵심 주장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를 핀셋처럼 발췌하여 요약하고, 그 증거가 왜 믿을 만한 것인지 논리적으로 탄탄하게 구축해 두어야 한다.

 

결국, 헌법재판의 최종 승자는 누가 더 목소리를 높였느냐가 아니라, 누가 재판관의 펜 끝에 가장 명확하고 흔들림 없는 '증거의 이정표'를 세워주었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마치며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은 당사자 간의 분쟁을 종결짓는 문서인 동시에, 대한민국의 법치주의가 도달한 현주소를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물이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증거 거시를 통해 판결의 투명성을 높이는 작업은, 헌법재판소가 국민의 신뢰라는 단단한 반석 위에 서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시대적 과제다. 사법부가 증거라는 차가운 이성을 바탕으로 사실을 확정하고, 그 과정을 결정문에 투명하게 새겨 넣을 때 비로소 진정한 헌법적 정의가 완성될 것이다.

※ 학술적 견해에 관한 안내: 본 칼럼은 헌법재판 실무 및 법리적 쟁점(증거 거시의 정도와 한계 등)에 관한 학술적 분석과 비판적 견해를 담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실제 결정문 작성 방식은 사건의 특수성, 재판관의 개별적 판단, 그리고 사안의 정치·사회적 맥락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본 글은 구체적인 헌법 소송 사건에 대한 공식적 법률 자문이나 해석 지침이 될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업데이트: 2026. 2.)